2008년 4월 22일 화요일

[스크랩] 갈비 이야기 - 한국인이 좋아하는 갈비

원본 URL : http://www.rgm.co.kr/news/article.html?no=435

뉴스관리자, rgmceo@irgm.co.kr

등록일: 2006-11-21 오전 10:00:07

우 리의 문헌에 갈비(乫非)라는 음식명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04년 중국사신을 영접하며 기록된 영접도감 소선상(小膳床)에 나타난다. 조선시대에 한문 표기는 갈비(乫非)라고 적고 한글로는"가리구이" "가리탕"등 "가리"라는 이름으로 불려진것 같다. 그러나 자세한 조리법은 1800년 대 말에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 갈비(乫飛)라는 이름으로 비교적 자세히 기록 되어 있다. "가리를 한 치 길이씩 잘라 삶되 양을 튀한 것과 부아, 곱창, 통무, 다시마를 함께 넣고 무르게 삶아 건진다.
가리찜 할때의 무는 탕 무처럼 설되 더 잘게 선다. 다른고기도 그 와 같이 썰고 다시마는 골패쪽 처럼 설고 표고, 석이 버섯도 썰어 놓는다. 파, 미나리는 살짝 데쳐 놓는다. 이상의 모든 재료를 갖은 양념에 가리를 섞어 주물러 볶아서 국물을 조금 있게 하여 그릇에 담고 위에 달걀을 부쳐 석이와 같이 채쳐 얹는다."라고 되어 있다. 조풍연 선생에 의하면 예전에는 갈비를 짝(소갈비 양쪽중 한쪽)으로 팔아 가정에서 명절이나 잔치집 때 한 짝을 사다가 잔치 음식으로 조리해 먹었지 그 외에는 가리음식을 먹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1939년경 서울 낙원동 평양냉면집 주인이 전라남도(지금의 광주광역시)송정리에 갔다가 그곳의 술집에서 가리구이를 대로 구워 파는 것을 보고 서울에 올라와 손님들에게 냉면과 함께 가리구이를 구워 팔기 시작 했으며, 당시는 냉면 한 그릇에 20전 특제가 30전이었고 갈비 한대가 20전이었으니 냉면 보통 한그릇과 갈비두대를 시켜 먹으면 60전으로 종로의 극장이나 요릿집, 카폐, 바등에서 파하고 술도 깰 겸 출출한 속을 채우는 야참으로 이만한 것이 없어 그 인기가 대단하므로 이 때부터 냉면집에서 갈비나 고기를 굽기 시작 해 대중화 되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야끼니꾸도 오사카의 쇼쿠도엔[식도원(食道園)]의 전신인 평양냉면집에서 유래 되었다.
오사카에서 평양냉면집을 경영하던 평양 출신의 임 광수라는 식도원 창업자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때 한국에 들어와 냉면집에서 불고기를 굽는것을 보고 일본 오사카에 돌아가 불고기를 굽기 시작한 것이 일본 야끼니꾸의 시초가 된 것이다.
미국의 LA갈비 역시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소고기 수입을 시작으로 80년대 중반 미국의 LA지역에 사는 교포들 사이에서 이미 LA갈비가 유통되고 있었고, 미국에 유학을 갔던 사람이 사업 실패 후 육류 중간 유통업자로 변신, LA지역 내 한국식당에 육류를 납품하면서 상품화하게 되었고, 일반적으로 미국 교포사회에서는 저녁 시간에는 우리나라 갈비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갈비 모양의 고기형태로 갈비를 팔고, 점심시간에는 LA갈비형태로 잘라 2-3조각을 밥에 얹어 점심메뉴로 판매하였으며. 점심용 메뉴의 저렴한 가격을 맞추기 위해 불갈비로의 가공비용과 시간 절약을 위해 LA갈비 형태의 갈비가 개발되어 LA를 여행한 한국 여행자들을 통해서 한국에 소개되고 상품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됨에 따라 1990년에 수입을 시작하기 시작 했다.
지금은 수입육의 49%가 갈비부위이며, 미국에서 도축되는 LA갈비 3/2가 한국에 수입되고 있다.
예전에 궁중이나 사대부집에서는 갈비구이보다는 주로 갈비찜이었고, 갈비구이는 1930년대 주막의 술안주로 서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쇠갈비로 유명한 곳은 수원갈비와 예산갈비가 유명했고 이동갈비와 왕갈비로 불려지는 안의찜갈비가 있다.
불갈비의 경우 뼈의 길이가 2인치인 것은 이동갈비 또는 불갈비라 불리는데, 이동갈비는 1960년대 초 이북에서 피난 내려 온 김 정민 할머니가 포천군 이동면 장암리에서 처음 시작하다가 문을 닫고 70년대 김 정민 할머니 집에서 주방을 맡았던 주방 아주머니와 조카가 김 정민 할머니의 손 맛을 이어 받아 장암갈비집이라 상호로 시작하다.
몇 년전 [김미자갈비집 : 031-531-4459]로 상호를 변경 했다.김미자 갈비집은 조선간장과 조청을 넣고 끓인 후 양념에 사과나 배등 과일을 넣어 갈비를 재워 그 맛이 독특하다.
한편 갈비와 함께 나오는 동치미의 시원한 맛은 갈비 맛을 한층 맛깔스럽게 하고 있다. 갈비의 길이가 4인치이면 수원갈비로 불려지는데, 수원 갈비는 수원 팔달문 안에 [화춘옥 :031-226-8888]이 원조집이며, 화춘옥은 수원 팔달구에서 형 이춘명(李 春明)씨와 1930년부터 화춘제과점을 하던 이 귀성(李 貴成)씨가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밀가루 공급이 끊기자 1945년 해방되던 해 수원 영동시장내 싸전거리에서 27평짜리 목조 건물에서 주먹만한 소갈비를 듬뿍 넣은 해장국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며 그 맛이 장안에 소문이나고 번창해지면서 양념갈비를 재웠다가 구어 파는 수원의 독특한 갈비를 탄생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잠시 가게 문을 닫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 부산 현지 사람에게 갈비 재우는 방법을 전수해 유명해 진 것이 해운대갈비이며, 이 해운대 갈비가 부산 갈비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화춘옥은 전쟁 후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외상도 주고 하다보니 경영란에 봉착하게 되자 시청 공무원이었던 아들 이 영근씨가 퇴직을 하고 다시 가계를 일으켜 60-70년대 경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수원 경기도청을 순시 하려면 꼭 화춘옥에 들러 갈비와 함께 막걸리를 들고 가셔서 이 집은 수원의 갈비 명가가 된 것이다.
화춘옥에서 41년 동안 갈비를 다루었던 문 이근씨는 갈비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이원길씨를 배출했고 이 원길씨는 갈비 조리업계의 대부로 많은 후진들을 배출했다. 해운대갈비가 수원갈비의 원조인 화춘옥 사장 이 귀성씨가 갈비 재는 방법을 전수해 주면서 한국전쟁시기인 1950년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그 집이 어느 집인지 확실치 않고 다만 해운대에서 암소 갈비 맛이 좋고 약 30여년간 갈비집을 해 온 해운대 [소문난암소갈비집 : 051-746-0033]이 그 명맥을 잘 이어오고 있다.

▲ 김영복 원장님

▒식생활문화연구가/시인 : 김 영복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원장
▒사)한국외식산업경영학회 부회장
▒한양대학교 사회교육원 외식계열 책임운영
▒sbs 모닝와이드 골목 대 탐험 전문가 고정 출연 중
▒mbc 대동 맛 지도 (8도의 떡) 등 다수 출연
▒김영복과 떠나는 향토음식순례(경남일보)
▒음식과 문화 (부산일보)
▒사라진 우리의 맛 (월간조선)
▒음식이야기(월간 국회보 :국회사무처발행)
▒김영복의 이야기가 있는 음식여행(미주 한국일보) 연재중

지 금은 [수원 본갈비][명성옥] [삼부자갈비집]등 수원 갈비의 명성을 이어가는 갈비집들이 많이 생겼으며, 예산의 [소복갈비집]도 성업중에 있고, 경남 진주에는 1945년 경부터 부산정육점을 하던 봉곡동 서부시장내 지금의 [진주냉면 :본점055-741-0525: 하대점 055-758-9077]의 암소 한우 생갈비가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독특하다. [안의 대중식당: 055-962-0666]은 2대에 걸쳐 그 명맥을 유지하면서 거창의 [별미식당] [대전식당]과 함께 왕갈비찜으로 알려져 있는 별미집들을 배출 했다. 특히 안의에는 [孝子白丁趙貴千之閭]라고 쓴 조선시대 신분사회에서 상상도 할수 없는 백정비석이 왕명에 의해 그 내력과 함께 세워진 곳으로 수십년전에는 전국의 백정들이 이곳에 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백정비석과 안의 왕갈비
함양군 안의면 소재지에 쇠부리 마을이 있다. 황석산을 따라 내린 진수산(대밭산)은 제월대 밑에 마치 배추속을 버무려 놓은 듯한 '김치바위'에서 마감되고 대밭산 자락에 형성 된 '쇠부리마을'은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관북마을의 백정 비석과 함께 마치 안의 왕갈비의 내력이 담겨져 있는 듯 하다 옛날 아느이현에서 과거 길을 가려면 향교앞을 지나 비단을 펼쳐 놓은 내라 하여 붙여진 금호강(錦湖江)을 건너 교북리 관북마을(역말)을 지나야 한다.
이 관북마을에 글 공부를 하는 조 귀천(趙 貴千)이라는 젊은이가 노부(老父)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이 늙은 아버지는 눈먼 소경이었다. 효성이 지극한 조 효자(趙 孝子)는 앞을 못보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해 봉양(奉養)을 했으나 아버지의 병이 차도(差度)가 없게 되자 정한수를 떠 놓고 매일 같이 지성으로 천지신명께 빌기를 백일이 되는 날 꿈속에 하얀 백발을 한 도사가 나타나 이르기를 "천일(千日)도안 소(牛)의 간(肝) 일천봉을 매일 같이 구하여 아버지에게 봉양을 하면 눈을 뜨리라!" 고 하였다.
조효자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글 공부하던 책을 덮고 당신 천민(賤民)을 취급되던 백정(白丁)을 자청하여 안의현의 토수막(안의 사람들은 도축장을 이렇게 부르고 있음)에 고용살이로 들어가 매일 한봉씩 3년간 구백구십구봉을 봉양하였으나 아버지의 병은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마지막 천일이 되는 날, 쇠간 한봉을 구해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갑자기 쏟아 진 폭우로 금호강이 범람하여 강 건너 집에 돌아 갈수 없게 되자, 조 효자는 강가에 털썩 주저 앉아 아버지가 계시는 맞은 편 집을 바라보며 마치 자신의 효심이 부족하여 폭우가 내린 듯 자책하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효자의 효심에 천지신명이 감동 하였는지 갑자기 강물이 상하로 갈라지며 길이 열려 조효자는 단숨에 집에 달려가 눈먼 아버지에게 쇠간을 봉양하니 아버지의 감겼던 눈이 뜨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신분의 귀천(貴賤)에 관계없이 조효자가 사는 집 앞 관북 금호강가에 효자비를 세우라는 왕명(王命)으로 '효자백정조귀천지려(孝子白丁趙貴千之閭)'라는 전국의 유일의 백정비(白丁碑) 즉 효자비(孝子碑)를 세워 효행의 본보기로 삼도록 하였고, 이 비는 지금도 관북들 금호강가에 돌보는이 없이 외롭게 서 있다.
옛날에는 소를 잡으면 쇠의 간이나 내장등 부속물은 토수막에서 수고한 백정들에게 삯전으로 주었다. 물론 전해 내려 오며 부풀려 진 부분도 있겠지만 이러한 전설과 같은 실화(實話)는 '안의에 오면 안의 왕갈비를 먹어야 한다'는 장맛이 맛깔스럽게 베여 있는 안의 왕갈비 맛과 함께 함양군의 문화적 자산으로 남아 있으나 지역에서는 그 가치를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 안의 왕갈비는 우선 크기가 주먹만하여 우선 보기만해도 포만감을 느낄 정도이다. 정월 장(醬)과 엿기름으로 고은 물엿등 갖은 양념으로 우선 갈비에 연하게 간하여 뭉근불에 오래 동안 끓이다, 표고버섯, 양파, 당근, 파등 야채를 넣어 고명으로 색깔을 맞춘 안의왕갈비는 모양새나 맛깔스러움이 식욕을 더 하게 한다.

전통식생활문화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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